다산 선생의 뉘우침
오늘 책을 읽다가 남겨서 가까이 두어야겠다는 글귀가 있어 적어본다.
내 나이 예순
한 갑자를 다시 만난 시간을 견뎠다.
나의 삶은 그르침에 대한
뉘우침으로 지낸 세월이었다.
이제 지난날을 거두어 정리하고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
이제부터 빈틈없이 나를 닦고 실천하고
내 본분을 돌아보면서
내게 주어진 삶을 다시 나아가고자 한다.
물론 다산 정약용 선생의 자찬묘지명에 나오는 글이다. 나이 60에 이르러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아 정리하고 남은 생을 본분에 맞게 충실하게 살겠다는 결의가 강하게 풍겨난다. 그런데 선생에게 있어 한 갑자를 다시 만난 지난 시간이 뉘우침으로 채워진 세월이라니. 선생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철학자로 어린 나이에 성균관에 들어가 그 뛰어난 재주로 정조의 눈에 들어 젊은 나이에 형조참의에 오르기까지 그야말로 승승장구했던 사람이다. 누구나 부러워할 인생을 살았다고도 할 수 있는데 다산은 그 삶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뉘우침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잘못 간직했다가 나를 잃은 자다... (중략)...
끝내 나라는 것은 멍한 채로 움직이지 않으며 돌아갈 줄을 몰랐다.”
자기를 지키지 못해 잃어버렸다고 했고 또 멍한 채로 움직이지 못해 마음에 두고서 바라보고 지향해야 할 그 지점으로 돌아가지 못했다고 했다. 모두 후회뿐이라는 말이다. 무척 당혹스럽고 선뜻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곧 씹어 되새김질해야 할 내용으로 느껴져 내 마음은 자꾸 이 글귀에 머문다. 사는 것은 다 후회와 뉘우침으로 귀결되는 헛된 것은 아닐 텐데 우리가 때때로 돌아보아 부족하거나 놓치는 것이 있어 이를 이르는 말로 후회나 뉘우침을 끌어다 쓰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살다 보면 인간은 그 한계로 다 잘할 수는 없다. 다산 선생처럼 살지 못해, 아님, 다산 선생처럼 살아도 더 채우지 못해 우리는 이리저리 후회할 수밖에 없다. 죽을 때까지 아니, 모든 인생의 순간에 후회하지 않는 삶이란 없다. 어떤 경우라도 후회되는 삶이지만 각자 그 삶의 깊이와 채워진 무게에 따라 그 내용은 다 다를 것이다. 다만 후회하는 순간에 더 나아지려고 자신을 다잡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뿐이다. 아마 다산 선생도 새로운 시작을 더욱 강하게 부여잡기 위해 후회와 뉘우침을 끌어올렸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새로움 시작은 지난 과거에 대한 성찰과 지난 잘못에 대한 반성이 전제되지 않고서야 더욱 강한 추진력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다산 선생의 이와 같은 후회와 뉘우침은 위대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자기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아가 어느 순간 일신의 영달을 위해 세상과 교잡하고 어울리며 안주하려는 또 다른 자아를 꾸짖고 밀어내면서 갖는 절절한 울분과도 같은 독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 주어진 삶을 다시 나아가고자 한다.’에서는 내게 주어진 삶, 즉 원래의 자아가 지향하고 꿈꾸는 삶으로의 완전한 회귀, 또는 탈바꿈을 선언한 것이다. 이 글을 쓸 때의 다산 선생과 지금 나의 연배가 비슷해서 그런지 각자 삶의 과정과 깊이가 다를지라도 그 시간에 축적된 무게감에서 나는 한없는 부끄러움과 동시에 모자람을 그리고 동시에 연민의 정을 느낀다. 나도 한때는 학업에 뜻을 두고 큰 꿈을 향해 매진했다지만 그리 성과랍시고 말할 만한 것은 없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가난에서 벗어나겠다는 일념 하나로 살면서 우여곡절만을 겪었을 뿐, 대단하다고 치켜세울 것도 물론 없다. 나도 이제 나이 60이 되어 정년퇴직하고 보니 가진 것보다는 많이 배우고 더 성숙하지 못했다는 후회감이 어찌나 크고 깊던지 한동안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했다. 지금까지 나의 삶은 주체적이지 못한 채 뭔가 지독한 허전함으로 알 수 없는 힘에 끌려다니는 보잘것없는 인생을 살았다. 학원 사업과 무역사업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한때 안정을 찾아 가난에서 벗어나긴 했으나, 주위에서 자수성가한 사업 가니 뭐니 하면서 내가 대단한 성공을 했다고 주위에서 떠받들어 주니 그만 거기에 도취해서 안주해버린 잘못을 하고 말았고 또 그러다가 사업 부진으로 돈을 잃고 실패하거나 하면 또 다른 사업이나 일거리를 찾아서 막무가내로 몸을 상해가며 몰두했던 그런 시간이 후반기 나의 삶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마치 좀비가 눈앞에 먹이를 쫓아 무조건 앞으로만 달려가는 그런 형국이었다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는 것 같다. 게다가 직장에서건 사회에서건 누구로부터도 싫은 소리 듣지 않으려고 - 그게 경쟁력인 줄 알았고 또는 내가 무능하다고 여길까 봐 얼마나 나를 누르고 참으며 혹시라도 낙오되지 않으려 사내 정치 안테나 세워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살지 않았던가. 그러다가 퇴임하기 전, 어느 날 우연히 중장년 일자리 센터에서 주최하는 재취업 준비 강연을 듣게 되었는데 문득 강연 도중에 강사가 눈을 감으라고 하면서 어렸을 때, 특히 학창 시절을 떠 올려보라고 했다. 그 꿈 많던 시절 나는 누구였으며 그때 꾸었던 꿈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어떤 꿈이었는지, 그리고 그 꿈은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라고 하는데, 갑자기 나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후끈 달아오르면서 아무것도 없는 진공상태와 같은 옥 째임에 의식이 가려져 점점 말소리마저 희미하게 들리더니 온몸이 도저히 알 수 없는 어두운 곳으로 깊이 빠져드는 것 같더니, 희미한 의식 속에서 갑자기 꿈을 꾸는 듯했는데, 그곳에서 검정 교복을 입은 까까머리 중학생이 운동장에 전교 조례로 모인 학생들 앞에서 교장 선생님을 향해 큰 목소리로 구령하더니, 또 갑자기 연단에 올라 보리밥 혼식을 장려하는 웅변을 하기도 하고 그러더니 또 점심시간이 되어선지 공을 차면서 운동장을 신나게 뛰어다니지를 않는가, 그러고는 부모님이 학교에 오셔서 같이 택시를 타고서는 어디 교육청인가 하는 곳에서 학생 대표로 상을 받는 장면도 보이고 하는 데 그 주인공인 중학생이 다름 아닌 나인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내가 가난이라는 것을 알기 전 순백의 동심에서 내 삶이라는 화원에 꿈을 심고 가꾸던 그 시절이 무슨 다큐멘터리처럼 영상으로 흘러가며 떠오르는 것이었다. 결국, 그 강사의 제안이 꿈을 잃고 헤매었던 과거의 나가 꿈을 찾은 지금의 나로 일체화되는 그때의 순간이 오늘 다산 선생의 잃어버린 자아와 겹쳐져 하나가 되어 버린 것이다. 분명 나도 잘못 간직했다가 지금까지 나를 잃은 자로 살았다. 그리고 다산 선생의 지적처럼 나를 찾아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 어딘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반드시 내 근본, 내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 꿈이 있고 진정한 나가 있어 행복한 그곳으로 말이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아무리 시간이 늦어도 그곳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 삶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빈틈없이 나를 닦고 실행함은 물론 나를 잃지 않는 것만이 다산 선생이 오늘 나에게 가르쳐준 진정한 깨달음이라 여기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다짐하고 또 명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