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바쁜 관계로 집안일을 주로 내가 하게 되면서 내 살림 실력이 많이 늘었지만 그래도 아직 부족해서 가족들에게 미안한 한 가지는 바로 요리 실력이다. 아이들이 모두 입맛이 예민하고 까탈스러워 밥상을 차릴 때마다 나도 덩달아 긴장하곤 한다. 아내는 그냥 내가 차려주는 대로 잘 먹지만 아이들은 웬만한 반찬에는 젓가락질도 하지 않으려는 데다 가리는 것도 많아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한 번 올라온 찬이나 국은 다시금 먹지 않고서 자기들 입맛에 맞는 음식만 골라서 간간이 먹는 등 밥상을 준비하는 나에게는 매번 무엇을 어떻게 차릴까 신경이 곤두선다. 특히 내가 요리조리 솜씨를 부린다고 차린 음식은 오히려 식재료 본연의 맛이 아니라며 퇴짜 맞기 일쑤다. 그나마 무난하게 잘 먹어주는 음식이 김치볶음밥 정도라서 지금의 다양하지 못한 내 요리 실력으로는 아이들 음식 기대치를 채워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모자란다. 그래서 매일 음식 준비하는 고민을 털어놓을 때마다 아내는 내게 요리를 배워 보라고 권한다. 사실 정년퇴임 후 얼마 안 있어 요리를 배워볼까 알아보았으나 마땅한 요리학원이 없었고, 또 있다손 하더라도 대부분 자격증반 위주라 부담 없이 가볍게 배우고 싶은 내 마음을 배려한 실습과정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할 수없이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요리 레시피를 참조하여 식사 준비를 하게 되었지만 기본 요리 실력이 없다 보니 요리 준비하는 과정에서 재료 준비라든지 식단 짜기가 만만치 않고 힘들어서 차츰 레시피보다는 그냥 완성된 요리를 찾아 주문하는 쪽으로 관심이 옮겨가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지금 냉장고는 온갖 완성된 볶음밥과 무슨 주먹밥 포장물로 넘쳐난다. 게다가 아침에 좀 식사 준비가 부실하고 만만치 않다 싶으면 바로 김밥 집으로 뛰어가 무슨 무슨 김밥을 사 오거나, 아니면 아파트 상가 내 국거리 무인점포에서 일 회분 부대찌개 또는 얼큰 소고깃국이나 무슨 설렁탕, 미역국 따위를 사 와서 급하게 끓여 내어 식탁에 올리기 바쁘다. 그게 나에게는 편하고 실수하지 않는 방법으로 아이들 아침 한 끼를 책임지는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김밥 볶음밥 라면 감자탕에다 심지어는 아이들이 학교 가서도 점심 메뉴로 주로 햄버거 세트 등을 사 먹는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다. 주말에 가족들이 모여 식사를 하려고 해도 아내와 나의 요리 준비가 탐탁지 않은 아이들로서는 미리 머릿속에다 무얼 먹을지 생각해두고 그것을 강요한다. 대개는 중국음식이나 피자 같은 음식으로 나가서 먹자거나 아니면 시켜 먹자고 말하는데 요리에 자신 없는 아내와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순순히 따르고 만다. 그러다 보니 일주일 내내 인스턴트 음식 아니면 배달음식 일색이다. 내가 만드는 김치볶음밥 외에는 모두 비슷비슷한 맛이라 썩 내키지 않는 식단이고 음식이지만 아이들이 좋아하고 잘 먹으니 어쩔 수 없이 맞추기만 해야 하는 현실에 조금 우울하고 안타까운 마음이다. 1960년대, 70년대 과거의 맛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가끔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돈다. 우리 어릴 때가 잘 먹었는지 아니면 지금 아이들이 잘 먹는지 궁금해지는 이유다.
우리 어릴 때는 극심한 굶주림은 없었다고 하더라도 배고픔은 가끔 있었다. 시궁창에 떠내려오는 밥알을 주워 모아 끓여 먹었다는 등의 “엄마 없는 하늘 아래” 같은 영화들이 내 어릴 때 우리 모두의 공감을 불러 모아 큰 인기를 끌었고 그런 유사한 내용이 신문기사로도 심심찮게 올라오는 그런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잘 먹었다고 기억을 하는데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배는 고팠지만 그래도 시골에 살아서인지 굶지는 않았다. 봄이면 소쿠리 하나 들고 엄마 따라 들이나 산으로 들어가 한나절 캐온 쑥으로 밀가루 섞어 버무리기로 쪄 먹거나 쑥국, 냉잇국은 물론 우리 집 앞에 지천이었던 미나리를 데쳐 초고추장에 찍어 먹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 당시 어머니가 끓인 된장국은 어찌나 달고 맛있던지 냉이와 달래 등이 들어가면 전혀 새로운 맛으로 우리의 입맛을 천국으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우리 집 담벼락에 붙어서 자라던 비름나물은 가장 손쉬운 비빔밥 재료여서 그냥 뜯어 고추장에 쓱쓱 비벼 먹으면 그 나름대로 뛰어난 별미였다. 아랫방 콩나물시루에서 직접 물 주어 기른 콩나물도 밥에 쪄서 그냥 풋고추 썰어 넣은 간장에 비벼 먹어도 한 끼 식사로 손색이 없었다. 철 따라 계절 따라 콩을 삶아 메주를 쑤어 아랫목에 재워두면 큼큼한 메주 익는 냄새가 방을 진동시켰고, 저녁에 둘러앉아 입이 심심할 때면 그때마다 메주에서 온전한 형태를 갖춘 콩알을 뽑아 입에 넣어 우물 거리기도 했었다. 따뜻한 아랫목에는 늦게 오시는 아버지의 밥그릇이 항상 들어있어 간혹 이불속 발에 차인 밥그릇이 밥뚜껑을 놓쳐버리면 하얀 쌀밥에서 나오는 밥 냄새가 코를 간질여 왔고, 간혹 튀어져 방바닥에 떨어진 밥풀을 줍노라면 덤으로 향긋한 간식을 맛보는 즐거움이 또한 있었다. 또한 학교 오고 가는 길에서 밭을 헤치는 정도가 아니라면 야단맞을 걱정 없이 간식거리를 구할 수 있는 대낮 서리는 철 따라 토마토나 오이, 가지 등을 싫증 날 정도로 실컷 먹게끔 풍성했고, 보리도 아무 논에 들어가 한 움큼 두 손으로 싹싹 비벼 주머니에 넣으면 하루 종일 껌처럼 씹고 다니며 심심함을 덜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들이나 산에는 필이라는 풀이 지천으로 있어 손가락 길이만큼 올라온 순을 벗겨서 그 안에 솜처럼 싸인 속살을 씹으면 배고픔은 금방 사라졌다. 진달래 꽃잎, 찔레꽃 가시 줄기는 그냥 별미로 맛만 보고 버리는 흔한 간식거리였고 산딸기랑 머루도 산에만 가면 흔하게 맛볼 수 있는 음식이었다. 나도 초등학생 때는 집이 넉넉지가 못해 점심 도시락을 가져가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그래도 나는 굶을까 걱정하지는 않았다. 나뭇가지 꺾어 젓가락 대용으로 교실을 돌면서 아이들 도시락을 한 번씩만 떠서 몇 명으로부터 얻어먹으면 별로 민폐 끼치지 않고서도 점심을 해결할 수 있었고, 아니면 학교 뒷산을 올라 재밌게 놀면서 배를 채워도 한 끼쯤 모자람이 없었던 것 같다. 메뚜기를 잡아 연탄불에 구워 먹기도 하였고, 논에서 볏단 하나 태워 대파나 토란 등을 구워 먹었던 기억도 뚜렷하다. 그때 먹었던 불에 익은 대파 맛은 어찌나 달고 구수했던지 원래 파 맛이 이랬던가 싶을 만큼 맛있게 먹었다. 또 뱀이나 개구리 등도 돌로 배를 갈라 잘 손질해서 볏단에 노릇노릇하게 구워 먹었던 기억도 있다. 그만큼 다양하게 조달해서 먹는 재미가 너무나도 좋았다. 가을이 되면 놀 거리에다 먹거리까지 많아 늘 즐거웠는데 옥수수도 자주 볏단에 불을 피워 구워 먹었고 마을에는 집집마다 감나무가 있어 감과 무화과도 그냥 함부로 따먹을 수 있는 만만한 과일이었다. 그때는 감이나 무화과는 돈으로 사 먹는 과일이 아니었다. 가을이 되면 추수 등 가을걷이로 농사 일손이 바빠지는데 그럴 때면 학교에서도 무슨 가정실습이란 명목으로 학교를 며칠 쉬게 했다. 그러면 나는 어머니와 함께 가을걷이 끝난 논밭을 다니며 벼 이삭을 줍거나 무밭에서 무청을 잔뜩 주워와 마루에 길게 줄을 쳐 놓고 무청을 주렁주렁 말려서 먹었다. 그러면 겨우내 맛있는 시래기가 되어 무쳐서 먹거나 국을 끓여서 먹기도 했는데 그 당시에는 너무 많이 먹는 흔한 음식이어서 지겨워 짜증을 부리며 먹기 싫어했던 것 같다. 그랬던 내가 어린 시절을 벗어나며 그 후 시래기 무청을 오랫동안 먹어보지 못하다가 몇십 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무청 시래기가 든 추어탕을 먹다가 어린 시절 어머니가 끓여주신 그 맛이 아련히 떠올라 혀끝을 맴돌면서 그 맛을 기억하는 몸을 두드리며 깨우는 바람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핑 돌아 얼마나 내가 이 맛을 그리워했는지 한참을 훌쩍거리며 먹었던 기억이 난다. 겨울은 또 어떡했는가. 어머니가 돼지기름을 사 오신 날은 무조건 밥을 두 그릇 먹는 날이었다. 돼지비계를 넣은 오래 묵힌 김장 김치가 들어간 김치찌개는 내 어린 시절 입맛의 최댓값, 그때 내 입맛의 화룡점정이었다. 지금 어디 소문난 비싼 고급 음식집에 가서 비싼 무엇을 먹어도 내 어린 시절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그때 그 비계 김치찌개 맛에는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다고 자신 있게 단언한다. 흥건한 국물이 아닌 잘잘하게 끓인 그 김치찌개는 내 몸이 기억하는 최고의 맛이라고 죽을 때까지 살아서 울부짖을 것이다. 겨울이어도 먹을거리는 언제나 있었다. 호미와 낫을 들고 꽁꽁 언 손으로 겨울 산을 헤매면 칡뿌리가 언제나 넉넉하게 우리의 먹거리가 되어 주었다. 지겹게 씹어댔던 칡뿌리의 그 맛을 겨울이면 지금도 떠올린다. 들큼하게 입안을 우려내는 그 구수함을 요즘 아이들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진 맛이고 여간해선 없는 잊힌 맛일 것이다. 60대 이상, 그것도 시골에서 살았던 사람만이 알고 있는 맛이고 향일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그때 그 맛은 지금의 그 어떤 맛보다도 깊고 아련한 정이라 할 수 있다. 되돌아갈 수 없는 맛이고 절대로 그 맛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에게서 떠날 수 없는 맛이다. 돈이 많아서 또는 배불러서 가졌던 맛이 아니라, 단연코 먹을 것이 없고 배고파서 부지런히 찾아다닌 맛이었고 그리고 자연에 묻혀서 얻어 낸 맛이었고 게다가 나를 낮춰서 먹어보는 겸손한 맛이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안다. 요즘 세상이 누리는 배부름은 자연과 멀어진 맛이요, 정이 없는 맛이며, 돈 들여 쉽게 구한 맛으로 구현해낸 특징 없고 단일한 배부름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추억 속으로 사라져 간 그 맛과 향과 깊이는 그저 입맛만 자극하는 오늘의 입맛으로는 흉내도 낼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맛을 느끼는 주체는 배고픔의 기저가 깔린 상태에서 그 위에 음식에 대한 감사함과 더불어 먹는 과정에서 수고하는 행위의 간절함으로 채워지고 완성되어가는 존재인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