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척 더운 날씨라 어디 나서기 힘들어 집에만 있었다. 하루 종일 에어컨을 틀어 놓고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이제 60이 넘어 정년퇴직 한지도 딱 1년 하고 1개월째다. 그렇다고 계속 쉰 것은 아니다. 정년 퇴임하고 바로 다음 날 가까운 도서관에 틀어박혀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읽고 싶은 책을 찾아 읽었다. 정년퇴임하기 전 책에 대한 갈증이 심해 퇴임하면 무조건 책을 읽어야겠다고 벼르던 터였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한 달에 10권씩 책을 빌려보는 것 외에 교보문고 샘 도서대여 서비스에 가입하여 한 달에 12권씩 도합 22권을 꼬박꼬박 읽어 나갔다. 그 당시 주로 읽었던 책은 교양서 수준의 과학서, 특히 우주와 생명의 기원, 그리고 지구의 역사를 서술한 책들과 역사서, 그리고 고전 문학서 등이었다. 읽어야 할 책들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통에 대출 반납 시간에 쫓겨 서두르다 보면 좀 더 깊이 있게 정독하거나 다독해야 할 책들을 놓치는 경우가 있어 그럴 때면 책 제목을 메모해 두고 차후를 기약한다. 그렇게 정년퇴임 후를 독서로 만끽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5개월이 지난 연말쯤 어느 날, 전 직장에서 연락이 와 올해 신규사업을 하게 되었는데 나더러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최고 경영진의 요청이라 거절하기 어려워 승낙하고 말았는데 내심 그리 내키지는 않았다. 그러자 정식 출근하기 보름 전부터 사전 답사 내지는 업무 파악이란 명목으로 무보수로 출근하기 시작했고 또 처음 해보는 일이라 알아야 내용들이 많아 그야말로 신입사원 재교육받듯이 강도 높은 재취업 준비를 해야 했다. 국가 돈을 교부받아 시행하는 사업이라 정부포탈 사이트인 이나라도움 업무지침같은 엄청난 두께의 책자들을 공부하며 밤낮으로 매달려야만 했다. 그 후 정식 출근해서는 모든 업무를 파워포인트나 엑셀로 작업해야 해서 서툰 업무 실력을 들키고 싶지 않아 퇴근해서는 인터넷 강의로 실무교육도 받으며 유능한 직원 행세를 했지만, 정작 신분은 1년 계약직에 최저시급 수준이라 업무 만족도가 정말 낮았다. 물론 회사에서는 정년퇴직한 사람 어디 받아 줄 데가 있겠냐 해서 나를 구제 차원에서 재취업으로 배려해 준 것이라 했지만, 그래도 아는 전 직원들과 매일 얼굴 마주치며 어울리는 게 왠지 어색하고 불편했으며, 또 내 후임자나 전 동료들의 술자리에 자주 끼게 되니 재 취업했다는 기쁨보다는 하루하루가 피곤하고 점점 지처가는 기분이었다. 그 무엇보다 전처럼 책 읽으며 나 혼자 있고 싶은 욕구가 끊임없이 올라와, 계속 줄을 서서 읽어 달라고 조르는 책들을 볼 때면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막 펼친 사업을 무책임하게 나 몰라라 내팽겨 칠 수가 없었고 또 한편으론 따뜻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봐 주는 시선도 외면할 수가 없어 묵묵히 참고 일을 해나갔다.
그러던 중 지난 5월 장인어른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다. 오랜 지병이 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줄은 몰랐다. 부랴부랴 부고장을 내고 부산 대형병원 특실을 마련하여 장인어른을 모셨다. 우리 회사에서도 사장님을 비롯하여 몇몇 직원들이 어려운 코로나 시국임에도 불구하고 문상을 와 주었다. 장례를 다 치르고 다시 출근하는 날, 회사를 향하는 내 발걸음이 너무 무거워 어디 낯선 길을 걸어가는 느낌이었고, 낯선 길을 헤매다 어디 구덩이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했으면 하고 바랄 만큼 내 마음의 허기와 갈증이 절정을 향하여 달리고 있었다. 눈빛은 초점을 잃고서 깊은 시름에 빠져 들었다. 내 나이 이제 62,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는 게 너무 간절했다. 그리고 내 남은 삶을 오로지 정직한 책 한 권 내는데 바치고 싶다. 내가 살다 간 이 세상에 작은 흔적 하나 남겨 놓는 방법은 오직 내 숨결이 담긴 책을 내는 것이라 믿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생이 다해 죽을 때 그 사람을 평하는 방법으로 무엇을 떠 올릴까? 결국 남겨 놓은 유산으로 평할 수밖에 없는데, 아무리 많은 재산을 남기고 좋은 일을 했다손 치더라도 그 사람의 가치가 기록으로 남겨져 있지 않으면 사람들은 자신에 뇌리에서 모든 것을 금방 지워버린다. 그렇게 무의미한 삶으로 사라진다. 이름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래서 내게 시간이 주어지기를 빌고 빌어 내 흔적 남기기에 전부 쏟아부어야 한다. 내 머리에서 나오는 내용이 어설프고 초라해서 아직 남길만 한 무엇이 없지만 지금부터라도 내 가치를 만들어 우격다짐으로 채워 넣고 또 짜내어 내 삶을 세상에 이어 줄 말과 글을 쏟아내야 한다. 그러려면 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 당장 말이다.
다시 출근 한 그다음 날 사장님께 사표를 던졌다. 장인어른께서 내게 많은 유산을 물려주어 굳이 직장을 다닐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 곧 사무실도 얻어야 하고 또 새 차를 뽑기로 했다고 호기를 부리면서 말이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매일 골방에 박혀서, 때론 도서관에 앉아서 새로운 내 시간을 만들어 가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내 꿈을 향해서 순항하고 있는 중이라 말할 수 있다...